About: Seong Sam-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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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Sam-mun (1418 — 8 June 1456) was a scholar-official of early Joseon who rose to prominence in the court of King Sejong the Great (r. 1418–1450). He was executed after being implicated in a plot to dethrone King Sejo (r. 1455–1468) and restore his predecessor King Danjong (r. 1452–1455), and is known as one of the sayuksin (사육신, the six martyred ministers) with reference to this p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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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سونغ سام مُن (ولد في 1418 ومات في 1456) كان عالماً ومسؤولاً حكومياً في بداية عهد سلالة جوسون حيث برز خلال عهد الملك سيجونغ العظيم (1418 - 1450). أُعدم سونغ مع خمسة آخرين بعد اكتشاف محاولة انقلاب ضد الملك سيجو (1455 - 1468) لإعادة الملك دانجونغ (1452 - 1455) ولذلك فهو يصنف ضمن «سايُكشِن» (بالكورية: 사육신 / الوزراء الستة الشهداء). (ar)
  • Seong Sam-mun (1418 — 8 June 1456) was a scholar-official of early Joseon who rose to prominence in the court of King Sejong the Great (r. 1418–1450). He was executed after being implicated in a plot to dethrone King Sejo (r. 1455–1468) and restore his predecessor King Danjong (r. 1452–1455), and is known as one of the sayuksin (사육신, the six martyred ministers) with reference to this plot. (en)
  • 成 三問(ソン・サンムン、せい さんもん、ハングル: 성삼문、1418年(太宗18年) - 1456年(世祖2年))は、李氏朝鮮前期の学者・政治家。死六臣の一人。字は謹甫・訥翁、号は梅竹軒。諡号は忠文。本貫は昌寧成氏。 (ja)
  •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선국 사간원 우사간 등을 지냈다. 그는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생육신인 성담수, 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그의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외손 의 후손과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충청남도 출신. (ko)
  • 成三問(1418年-1456年),字謹甫(근보)、訥翁(눌옹),号梅竹軒(매죽헌)。本貫昌寧成氏。朝鮮王朝前期学者,政治家。訓民正音八位编者之一,亦是死六臣之一。 (z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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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ŏng Sammun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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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ejukhŏn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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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ŭnbo, Nurong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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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ng Sammun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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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سونغ سام مُن (ولد في 1418 ومات في 1456) كان عالماً ومسؤولاً حكومياً في بداية عهد سلالة جوسون حيث برز خلال عهد الملك سيجونغ العظيم (1418 - 1450). أُعدم سونغ مع خمسة آخرين بعد اكتشاف محاولة انقلاب ضد الملك سيجو (1455 - 1468) لإعادة الملك دانجونغ (1452 - 1455) ولذلك فهو يصنف ضمن «سايُكشِن» (بالكورية: 사육신 / الوزراء الستة الشهداء). (ar)
  • Seong Sam-mun (1418 — 8 June 1456) was a scholar-official of early Joseon who rose to prominence in the court of King Sejong the Great (r. 1418–1450). He was executed after being implicated in a plot to dethrone King Sejo (r. 1455–1468) and restore his predecessor King Danjong (r. 1452–1455), and is known as one of the sayuksin (사육신, the six martyred ministers) with reference to this plot. (en)
  • 成 三問(ソン・サンムン、せい さんもん、ハングル: 성삼문、1418年(太宗18年) - 1456年(世祖2年))は、李氏朝鮮前期の学者・政治家。死六臣の一人。字は謹甫・訥翁、号は梅竹軒。諡号は忠文。本貫は昌寧成氏。 (ja)
  • 成三問(1418年-1456年),字謹甫(근보)、訥翁(눌옹),号梅竹軒(매죽헌)。本貫昌寧成氏。朝鮮王朝前期学者,政治家。訓民正音八位编者之一,亦是死六臣之一。 (zh)
  •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선국 사간원 우사간 등을 지냈다. 그는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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