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i Han-eung (Korean:이한응, Hanja:李漢應, 30 October 1874 — 12 May 1905) was a Korean diplomat in London, UK. He served as Charge d'Affaires of the Korean Emperor Gojong to the UK and Italy when the Korean Peninsula was about to be occupied by the Japanese. He made efforts to keep his nation independent in the era of imperialism, but eventually committed suicide in his office on Trebovir Road in London in May 1905, when it became apparent that Korea would lose its status as an independent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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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응 (ko)
- Yi Han-eung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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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i Han-eung (Korean:이한응, Hanja:李漢應, 30 October 1874 — 12 May 1905) was a Korean diplomat in London, UK. He served as Charge d'Affaires of the Korean Emperor Gojong to the UK and Italy when the Korean Peninsula was about to be occupied by the Japanese. He made efforts to keep his nation independent in the era of imperialism, but eventually committed suicide in his office on Trebovir Road in London in May 1905, when it became apparent that Korea would lose its status as an independent nation. (en)
- (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한응 (1849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한응(李漢應, 1874년 9월 21일 ~ 1905년 5월 12일)은 본관은 전의이고 대한제국의 관료, 외교관이다. 순국 열사(殉國 烈士)로 자는 경천(敬天)이며 호는 국은(菊隱)이고 李漢膺(이한응)이라는 일명으로도 불리었다. 이명호(李命鎬, 1846~188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곤양(현 경남 사천) 군수였던 삼촌 이경호(李璟鎬, 1858~1894)가 동학 농민 운동에서 농민군을 진압하던 도중 황토현 전투에서 전사한 뒤 이경호 밑으로 출계하였다. 1899년 한성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선출되었다. 나라의 외교권이 빼앗기는 을사늑약을 앞두고 1905년 5월 12일 영국 런던에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후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은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되고 장충단 배향 및 내부협판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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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한응 (1849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한응(李漢應, 1874년 9월 21일 ~ 1905년 5월 12일)은 본관은 전의이고 대한제국의 관료, 외교관이다. 순국 열사(殉國 烈士)로 자는 경천(敬天)이며 호는 국은(菊隱)이고 李漢膺(이한응)이라는 일명으로도 불리었다. 이명호(李命鎬, 1846~188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곤양(현 경남 사천) 군수였던 삼촌 이경호(李璟鎬, 1858~1894)가 동학 농민 운동에서 농민군을 진압하던 도중 황토현 전투에서 전사한 뒤 이경호 밑으로 출계하였다. 1899년 한성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선출되었다.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駐箚)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런던에 공사 민영돈과 함께 부임하였고 1903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되었다. 이한응은 1904년 1월 13일 영국 대외사무소(Foreign Office)를 방문하여 한반도 정세분석에 관한 10쪽의 서한과 메모를 전달하는 것으로 공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서한에서 극동정세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영국 정부가 극동, 특히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망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영토보존 보장 등 5개항을 영국 정부가 보장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약소국의 대표였고 예상대로 당시 외부장관인 랜즈다운 경을 비롯한 영국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나라의 외교권이 빼앗기는 을사늑약을 앞두고 1905년 5월 12일 영국 런던에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후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은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되고 장충단 배향 및 내부협판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ko)
- Yi Han-eung (Korean:이한응, Hanja:李漢應, 30 October 1874 — 12 May 1905) was a Korean diplomat in London, UK. He served as Charge d'Affaires of the Korean Emperor Gojong to the UK and Italy when the Korean Peninsula was about to be occupied by the Japanese. He made efforts to keep his nation independent in the era of imperialism, but eventually committed suicide in his office on Trebovir Road in London in May 1905, when it became apparent that Korea would lose its status as an independent nation.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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